IBS, 소리가 조절하는 화학반응 규명…시각화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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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여송
작성일20-08-1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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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분자 거동 제어…소리를 화학반응에 접목한 첫 연구
소리 주파수와 그릇 형태에 따라 물결 패턴 조절 가능
국제 학술지 '네이처 케미스트리'에 논문게재
연구진 "생명활동의 이해를 도울 것으로도 기대돼"
[대전=뉴시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이용해 생성된 다양한 패턴들. 파란색의 염료 분자(환원된 바이올로젠)가 산소를 만나 무색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소리를 적용해 생성된 색깔 패턴들을 확인할 수 있다. 패턴의 모양은 소리의 종류나 접시의 모양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
[대전=뉴시스] 김양수 기자 = 소리에 따른 화학반응을 국내 연구진이 관찰하고 시각화하는데 성공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은 복잡계자기조립연구단 김기문 단장(포스텍 화학과 교수) 연구팀이 소리가 물리현상뿐만 아니라 화학반응까지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규명하고 결과를 눈으로 관찰하는데 성공했다고 11일 밝혔다.
소리는 에너지가 낮아 화학반응에는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정설이었다.
IBS 연구진은 물의 움직임에만 주목한 기존 연구와 달리 물의 움직임에 의한 공기의 용해도 변화에 관심을 두고 이번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진은 스피커 위에 페트리 접시를 올려둔 뒤 소리가 접시 안의 물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관찰, 소리가 만들어낸 미세한 상하 진동으로 접시 안에 동심원 모양의 물결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동심원 사이의 간격은 주파수가 높아질수록 좁아졌고 그릇의 형태에 따라 다른 패턴을 나타냈다. 이는 소리의 주파수와 그릇의 형태에 따라 나타나는 물결의 패턴을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또 연구진은 지시약을 이용해 소리가 만들어낸 물결이 화학반응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했다.
[대전=뉴시스] BTB 지시약과 소리를 이용해 생성된 패턴. 페트리 접시에 담긴 BTB 염기성 용액(왼쪽 파란색)을 이산화탄소와 소리에 노출시켜서 BTB 산성 용액(오른쪽 노란색)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생성된 색깔 패턴.분석과정에서 연구진은 파란색이지만 산소와 반응하면 무색으로 바뀌는 염료(바이올로젠 라디칼)를 접시에 담아 스피커 위에 올려 놓은 뒤 소리를 재생했다. 이를 통해 물결에서 움직이지 않는 마디 부분은 파란색을 유지하는 반면 주기적인 상하운동을 하는 마루와 골(가장 높은 부분과 낮은 부분)은 산소와 반응하며 무색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했다.
공기와 접촉이 활발해 산소가 더 많이 용해되기 때문이다.
이어 산성도(pH)에 따라 색이 변하는 지시약인 BTB 용액을 이용해 추가 실험을 진행, 접시에 담긴 파란색 BTB 용액을 스피커 위에 놓고 소리를 들려주며 이산화탄소에 노출시켰다.
소리를 들려주자 물결로 인해 기체의 용해도가 부분적으로 달라지면서 산성, 중성, 염기성이 공존하는 용액이 만들어져 용액 속에 파란색, 녹색, 노란색이 구획별로 나타났다.
연구를 주도한 황일하 연구위원은 "용액의 산성도는 전체적으로 동일하다는 상식을 뒤엎은 흥미로운 결과"라면서 "소리로 산화·환원 또는 산·염기 반응을 일으켜 물리적 가림막없이도 용액 내 화학적 환경을 서로 다르게 구획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김기문 단장도 "지금까지 평형상태에서 고주파로 화학반응을 조절하려는 연구가 시도된 적은 있지만 실제 자연과 같은 비평형상태에서 소리를 이용해 화학반응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소리가 생체 내 화학반응에 미치는 영향으로 확장돼 생명활동의 이해를 도울 것으로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케미스트리(Nature Chemistry, IF 21.687)에 11일자(한국시간)로 실렸다.(논문명:Audible sound-controlled spatiotemporal patterns in out-of-equilibrium syst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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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분자 거동 제어…소리를 화학반응에 접목한 첫 연구
소리 주파수와 그릇 형태에 따라 물결 패턴 조절 가능
국제 학술지 '네이처 케미스트리'에 논문게재
연구진 "생명활동의 이해를 도울 것으로도 기대돼"
[대전=뉴시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이용해 생성된 다양한 패턴들. 파란색의 염료 분자(환원된 바이올로젠)가 산소를 만나 무색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소리를 적용해 생성된 색깔 패턴들을 확인할 수 있다. 패턴의 모양은 소리의 종류나 접시의 모양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 [대전=뉴시스] 김양수 기자 = 소리에 따른 화학반응을 국내 연구진이 관찰하고 시각화하는데 성공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은 복잡계자기조립연구단 김기문 단장(포스텍 화학과 교수) 연구팀이 소리가 물리현상뿐만 아니라 화학반응까지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규명하고 결과를 눈으로 관찰하는데 성공했다고 11일 밝혔다.
소리는 에너지가 낮아 화학반응에는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정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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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진은 스피커 위에 페트리 접시를 올려둔 뒤 소리가 접시 안의 물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관찰, 소리가 만들어낸 미세한 상하 진동으로 접시 안에 동심원 모양의 물결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동심원 사이의 간격은 주파수가 높아질수록 좁아졌고 그릇의 형태에 따라 다른 패턴을 나타냈다. 이는 소리의 주파수와 그릇의 형태에 따라 나타나는 물결의 패턴을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또 연구진은 지시약을 이용해 소리가 만들어낸 물결이 화학반응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했다.
[대전=뉴시스] BTB 지시약과 소리를 이용해 생성된 패턴. 페트리 접시에 담긴 BTB 염기성 용액(왼쪽 파란색)을 이산화탄소와 소리에 노출시켜서 BTB 산성 용액(오른쪽 노란색)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생성된 색깔 패턴.분석과정에서 연구진은 파란색이지만 산소와 반응하면 무색으로 바뀌는 염료(바이올로젠 라디칼)를 접시에 담아 스피커 위에 올려 놓은 뒤 소리를 재생했다. 이를 통해 물결에서 움직이지 않는 마디 부분은 파란색을 유지하는 반면 주기적인 상하운동을 하는 마루와 골(가장 높은 부분과 낮은 부분)은 산소와 반응하며 무색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했다.공기와 접촉이 활발해 산소가 더 많이 용해되기 때문이다.
이어 산성도(pH)에 따라 색이 변하는 지시약인 BTB 용액을 이용해 추가 실험을 진행, 접시에 담긴 파란색 BTB 용액을 스피커 위에 놓고 소리를 들려주며 이산화탄소에 노출시켰다.
소리를 들려주자 물결로 인해 기체의 용해도가 부분적으로 달라지면서 산성, 중성, 염기성이 공존하는 용액이 만들어져 용액 속에 파란색, 녹색, 노란색이 구획별로 나타났다.
연구를 주도한 황일하 연구위원은 "용액의 산성도는 전체적으로 동일하다는 상식을 뒤엎은 흥미로운 결과"라면서 "소리로 산화·환원 또는 산·염기 반응을 일으켜 물리적 가림막없이도 용액 내 화학적 환경을 서로 다르게 구획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김기문 단장도 "지금까지 평형상태에서 고주파로 화학반응을 조절하려는 연구가 시도된 적은 있지만 실제 자연과 같은 비평형상태에서 소리를 이용해 화학반응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소리가 생체 내 화학반응에 미치는 영향으로 확장돼 생명활동의 이해를 도울 것으로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케미스트리(Nature Chemistry, IF 21.687)에 11일자(한국시간)로 실렸다.(논문명:Audible sound-controlled spatiotemporal patterns in out-of-equilibrium syst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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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40] '한국학의 거함' 이규태
"자네 지금 장난하나? 이게 무슨 기사가 되나, 사망 사고도 아닌데!" 1959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이규태(李圭泰·1933~2006)가 사회부 기자로 뛰던 초년 시절이었다. 세 살배기 아기가 전차 밑에 깔렸으나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현장에 달려간 그는 전차 바닥 높이를 자로 잰 뒤 일필휘지로 기사를 썼다. 하지만 사회부장은 원고를 찢어버렸다. 이규태는 항변했다. "전차에 깔리면 죽는 게 당연한데 죽지 않았으니 기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규태는 평생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한 기자였다. 전북 장수의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육하원칙에 따라 쓰는 기사가 호두 껍데기라면 그 안의 인간적 맥락을 찾아 의미를 캐내는 것이야말로 호두 알맹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1960년대에 쓴 기사 '소록도의 반란'은 작가 이청준에 의해 '당신들의 천국'이란 소설로 재탄생했고, 이 소설에서 이규태는 'C일보 이정태 기자'로 등장했다.
1998년 자택 서재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 그는 23년 동안 ‘이규태 코너’를 6702회 연재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덕훈 기자
2년 차 기자였던 1960년, 그는 한국을 찾은 '대지'의 작가 펄 벅과 함께 지방을 여행했다. 지게를 진 채 소달구지를 끄는 농부를 본 펄 벅이 "미국인이라면 달구지에 올라탔을 텐데… 소의 짐까지 덜어주려는 마음이다"라며 감탄했다. 이때 받은 충격은 그를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흐르는 것이 무엇인가'란 고민에 빠지게 했다. 1968년 연재한 '개화 백경'은 그 고뇌의 산물이다. '이규태 한국학'의 시작이었다.
서양 문화의 무분별한 수용, 고도성장과 빈부 격차 속에서 사회는 삭막해졌고 한국인은 주눅 들어 있었다. 한국 문화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사명감이 빛을 발했다. '개화 백경'이 우리 것을 찾는 시대정신을 일깨웠다면, '한국인의 의식구조' 등 30여 개 대형 시리즈는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1983년 3월 1일, 그를 '한국학의 거함(巨艦)'으로 만든 '이규태 코너'가 첫선을 보였다. '이완용 집 고목'으로 시작한 이 코너는 매일 200자 원고지 6~7장 안에 동서고금을 오가는 이야기로 시사 문제를 풀어내는 칼럼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책 1만5000권이 사방을 가득 메운 지하실 서재를 뒤져 자료를 챙긴 뒤 출근했다. 그만의 독특한 분류법으로 '안락사' 하나를 가지고도 스파르타와 로마제국, 여진족 풍습까지 찾아냈다.
풍부한 자료에 감칠맛 나는 글솜씨, 세계를 발로 누빈 체취가 밴 그의 칼럼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선일보를 펼치면 꼭 '이규태 코너'부터 먼저 읽고 스크랩을 했다"는 사람들을 지금도 흔히 만난다. 5000회를 맞은 1999년 11월 15일 자에서 이규태는 "동서(東西)에 공간적 조명을 하고, 고금(古今)에 시간적 추이를 더듬어 각기 다르게 물든 가랑잎 한 잎씩을 신문 갈피에 접어 독자에게 드렸다"고 회고했다.
조선일보에서 초대 월남 특파원, 문화부장, 사회부장, 주필, 논설고문 등을 지낸 이규태는 2004년 퇴임했다. '이규태 코너'는 2006년 2월 23일까지 6702회 실렸다. 한국 언론 사상 최장수 칼럼 기록이었다. "글로 먹고사는 놈에게 항상 무언가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고별 칼럼에서 고백했다. 그리고 이틀 뒤 별세했다. "박물관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버렸다"는 애도가 이어졌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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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는 평생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한 기자였다. 전북 장수의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육하원칙에 따라 쓰는 기사가 호두 껍데기라면 그 안의 인간적 맥락을 찾아 의미를 캐내는 것이야말로 호두 알맹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1960년대에 쓴 기사 '소록도의 반란'은 작가 이청준에 의해 '당신들의 천국'이란 소설로 재탄생했고, 이 소설에서 이규태는 'C일보 이정태 기자'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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